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 간섭기 (문단 편집) == 원의 간섭과 수탈 내용 == 이것이 800년 전 역사이고, 현재 [[몽골]]이 그다지 영향력있는 나라가 아니며, [[기황후]] 등을 [[기황후(드라마)|미화하는 사극]] 덕택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뿐이지, 원에 입조한 후 고려는 정치・외교・군사・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부문에서 제국의 내적 존재가 되어가[* Lee, Ki-Baik (1984). A New History of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p. 157. ISBN 9780674615762.], 명목상의 반쪽짜리 국가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1218년부터 [[여몽전쟁]]이 발발하면서 고려는 몽골군과 지속적으로 교섭과 전투를 벌였으며, 1230년대 우구데이 카안 치세에는 몽골군이 고려에 호구 조사를 요구하는 등 체계적인 수취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250년대까지 전쟁이 지속되면서 정기적인 의례나 수탈 행위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1259년 고려 고종과 조정은, 몽골 측이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내놓은 태자 친조를 강화를 위해 수락하고, 쿠빌라이를 만나고 귀국한 [[원종(고려)|태자]]가 즉위하여 영안공을 필두로 한 사신을 보내어 칭신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된다.[* 김호동(2015), 《몽골제국과 고려》, p. 83~92.); 정동훈(2020), <고종대 고려-몽골 관계에서 ‘조공’의 의미>, 《한국중세사연구》 61; 정동훈(2020), <1260-70년대 고려-몽골 관계에서 歲貢의 의미>, 《진단학회》 134.] 1260년 쿠빌라이는 대고려 정책을 전적으로 자신이 주관하여 일원화할 것은 천명하였고, 1263년부터 6사(六事)를 요구하면서 고려는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세공(歲貢)을 바쳐야 했다.[* 김호동(2015), 《몽골제국과 고려》, p. 93~94.] 이러한 세공은 1281년 [[충렬왕]]이 [[부마]]로서 지위를 공고히하기 전까지 유지되었으며, 이를 비롯하여 1300년대 초까지 막대한 경제적, 인적 자원 등을 수탈당했다.[* 정동훈(2020), <1260-70년대 고려-몽골 관계에서 歲貢의 의미>, 《진단학회》 134.] 또한 원 간섭기 고려 국왕은 원 황제의 부마 및 정동행성의 수장으로 임명되고 종종 소환, 폐위되기도 했으며, 비록 명목상 고려국의 최고 권력자였으나 이제 '''최고 권력은 몽골 황제에게 있었다.''' 신료들은 물론 국왕까지 모두 몽골 황제권 하에 들어오면서 고려 국왕은 사실상 고위 신료들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몽골 관료들과의 갈등 중에서도 몽골 황제권에게 권위를 기대야 했다. 이러한 양상은 외치와 내치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을 의미한다.[* 이명미(2017), <성지(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외교 환경>, 《역사비평》121, p. 3~10] 다음은 원 간섭기 동안 고려의 내정간섭 문제들과 원나라로 인한 여러 사회 문제들 중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① 고려는 고려 스스로 임금을 세울 수 없었다. 원 간섭기 동안 고려 국왕과 그 후계자는 몽골 황제권이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원 조정은 고려 [[세자]]들을 볼모로 데려갔다. 원 간섭기 이전의 왕위 계승 후에 외국으로부터 형식적으로 인정받던 [[책봉]] 허례와 달리 이 시기 고려 국왕은 몽골 황제권에 의해 직접 임명되고 폐위되었는데 [[충선왕]]과 [[충혜왕]]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었다.]''' * [[심왕]] 제도(瀋王 制度): [[요동]] 일대의 고려인의 통치를 구실로 고려 왕씨 왕족을 심왕으로 임명하여 고려에 대한 분열정책의 일환으로서 왕위 쟁탈전까지 벌어지게 만들었다. 초대 심왕이 된 [[충선왕]]은 고려에 귀국하지 않고 중원에서 원격 통치를 시작했고 측근 세력들이 고려를 다스리다 보니 부패한 측근들에 의해 고려 조정이 어수선해졌다. 그리고 [[충숙왕]] 대신 조카 [[왕고]]에게 심왕을 준 후 정작 자신은 좌천된다. 원 영종 시더발라(ᠰᠢᠳᠢᠪᠠᠯᠠ)가 충선왕을 [[티베트]] 지역으로 유배보낸 것. * 툴루게(禿魯花, 독로화) 제도: 몽골어 '툴루게'는 인질을 의미한다. 고려 후기 왕족 및 귀족의 자제들이 인질의 형식으로 원나라에 보내진 것. 1241년(고종 28) 처음으로 왕족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과 귀족 자제 10인이 끌려갔고 1271년(원종 12)에는 세자 왕심(王諶: 뒤의 [[충렬왕]])과 송빈(宋玢), 설공검(薛公儉), 김서(金㥠) 등 귀족 자제 20인이 끌려갔다. 1275년(충렬왕 1)에는 대방공 왕징(帶方公 王澂) 등이 끌려갔다. 1279년엔 김방경(金方慶), 원부(元傅), 박항(朴恒), 허공(許珙), 홍자번(洪子藩), 한강(韓康), 설공검, 이존비(李尊庇), 김주정(金周鼎) 등 고위관직자의 자제들이 끌려갔다. 이후 1282년과 1284년, 1301년, 1313년에도 인질들이 끌려갔다. '''② 국가 최고의결권을 원 조정이 가지고 있었다. 고려 왕실은 국가 주요 안건에 대한 의결을 내릴 때마다 언제나 원의 인가를 받아야만 했다.''' * [[정동행성]] 같은 여러 내정간섭 기구들의 설치 '''③ 고려는 상비군을 거느릴 수 없었고, 원으로부터 수시로 병부와 군대를 사찰받았다.''' * 순마소(巡馬所): 원나라가 종래 고려의 포도기관(捕盜機關)이었던 야별초(夜別抄)를 혁파하고 만든 기관.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제공관(提控官)이 되어 관리했다. 개경의 치안을 담당한다면서 반원파 인사를 주로 체포해갔으며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로 확대 개편되었다가 조선시대 [[의금부]]로 재편된다. 일종의 금군 겸 치안기구. * 만호부(萬戶府): 일본 정벌의 실패 직후인 1281년, 원나라가 고려에 설치했다. 관직 책임자는 원나라의 관직으로서 임명되었고 공민왕 이전까진 주로 원나라에서 임명했다. 만호(萬戶), 천호(千戶), 백호(百戶) 등 북방의 유목민, 특히 몽골인들이 주로 쓰던 10진법에 의해 군사를 편성하고 관리했다. 고려의 국방과 치안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④ 원나라는 2차례 삼별초 토벌(1271, 1273)과 5차례의 일본 원정(1274, 1280, 1283, 1285, 1293)을 기획하면서 전함병량도감(戰艦兵粮都監)[* [[원나라]]의 일본 원정 등에 필요한 전함을 건조하고 군량미를 보급할 목적으로 고려에 설치한 관청.]을 설치하고, 농무별감(農務別監)[* 원나라가 소와 농기구를 징발해가기 위해 고려에 파견한 관리]을 파견하여 고려의 인력과 자원을 수탈하였다. 그 밖에 고려는 평시에도 제국을 위한 식량과 물자를 수시로 공급해야 했다.''' * 응방(鷹坊): 원 황실이 조공품으로 요구하는 해동청(海東靑)을 잡고 길러서 보내기 위해 설치하였다. [[매(조류)|매]]사냥을 즐긴 [[몽골인]]들에게 매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궁궐 안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는데 매의 수요는 늘어만 갔고, 응방에 속한 관원들은 왕의 권력을 배경으로 횡포가 극심하였다. 고려 내의 몽골인과 같이 면역·면세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제적 기반으로 많은 사전(賜田)을 받았고 노비와 소작인을 거느렸다. 수많은 고려인들이 피폐해져 굶어죽었다. '''⑤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하고 원에 [[공녀]]를 바치게 되었다.'''[* 이 시기 끌려간 공녀 수는 수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자세한 것은 본 문서의 '공녀(貢女) 수탈' 항목 참조.] 결혼도감(結婚都監)은 일명 '과부•처녀 추고 별감'이라고도 불렸으며, 1274년 3월에 최초로 젊은 여성 140인을 끌고 간것을 시작으로 1355년(공민왕 4)까지 80년에 걸쳐 총 176명이 끌려갔다. 민간의 독녀(獨女), 역적의 처, 파계승의 딸들 같이 힘이 없는 하층민 여성들만 [[공녀]](貢女)가 되었을 것 같지만, 좋은 출신의 여성도 포함하도록 요구받았기 때문에 상류층 여성들도 공녀로 끌려가곤 했다. '''⑥ [[다루가치]]의 배치''': 1231년 [[평양|서경]]을 비롯한 [[평안도|서북면]] 지역에 72명의 다루가치를 배치한 것이 시초로, 1년 후 도단(都旦)을 [[개경]]에 파견하여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 1259년 [[원종(고려)|원종]]이 귀국하면서 쿠빌라이의 다루가치들이 원종과 함께 고려에 입국함에 따라 전국에 배치되었으며, 1273년 [[삼별초 항쟁]]이 좌절된 뒤 [[제주도]]에 설치한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에 다루가치가 최종 배치되었다. 역할은 주로 감찰관 역할, 내정간섭, 엄청난 수준의 공물 징수 감독 등이었다. 중서성을 비롯한 고급 관청을 제외하고 그 예하의 중앙관청과 모든 지방 행정관청에 존재했다. 1278년 김방경 무고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친조한 충렬왕의 의도와 고려 국왕의 부마 지위에 따라 고려에서 다루가치는 모두 철수했으며, 고려 국왕은 정동행성의 승상이 되어 고려 내지에서 최고 권력을 휘둘렀다. '''⑦ 왕실 호칭 격하''': 짐 → 고, 폐하 → 전하, 태자 → 세자, ~조/종 → 충~왕, 선지 → 왕지, 상서 → 판서, 시랑 → 총랑, 사 → 유, 주 → 정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jsessionid=D98F2FC8C2D2FEF2924D1606ECA2F655?levelId=kr_028r_0040_0030_0090|#]] * [[묘호]]의 사용 금지와 '충'(忠)자 돌림의 [[시호]]의 사용.[* [[시법]]에 따르면, 忠은 신하에게만 붙일 수 있다. 달리 말해, 제왕이라면 忠 글자를 쓸 수 없는 것.] '''⑧ 부원배 [[권문세족]]들의 성장과 전횡''' '''⑨ 영토의 간섭''' 영토의 간섭은 다음과 같다. [[파일:367px-원_간섭기_시기의_고려.png]] * [[동녕총관부]](東寧摠管府): 1269년 서북면병마사 [[최탄]](崔坦)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서경(고려)|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개 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개 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1269년에서 1290년까지 21년간 자비령 이북을 지배하였다. 이후에는 땅은 반환하고 요동으로 옮겨졌다. *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1258년에 [[조휘]](趙暉)와 [[탁청]](卓靑)이 고려의 지방관을 죽이고 몽골에 항복. 1356년 쌍성총관부의 신흥 천호였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공민왕에게 내응하면서 탈환. 1258년에서 1356년까지 98년간 존속했다. *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1273년 [[삼별초]]를 진압한 후 설치. 1300년 [[탐라만호부]]로 변경. [[공민왕]] 때에 폐지되지만 장기간에 걸친 탐라총관부의 설치로 인해 반고려 운동이 벌어져 1374년 [[목호의 난]]이 발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